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독립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igning-members-US-Constitution-painting-Constitutional-Convention-September-17-1787.jpg|width=100%]]}}}|| || {{{#000000 {{{-1 '''《미국 헌법 서명 장면(Scene at the Signing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br]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Howard Chandler Christy), 1940, 캔버스에 유화'''}}}{{{-2 [br]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년 9월 17일 당시 미국 헌법을 서명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 미국 헌법 서명 장면이다. 당시 서명식에 참석한 55명의 건국의 아버지들 중 39명만 그려졌다. [br] 그림 오른쪽 연단 위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조지 워싱턴이다.}}}}}} ||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제정, 1789년 9개주 이상의 비준을 통해 발효됨으로써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새 연방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전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제헌회의의 의장으로 재선출되면서 새로운 합중국의 초대 [[미국 대통령|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미국 헌법, 문단=2)] 이때 [[대통령제]]라는 정치체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워싱턴은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때문에 이 지위가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선거군주제|선출되었던 황제]]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시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은 실질적인 통치행위 외 여러 의전에서 타국의 황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시민들은 조지 워싱턴에게 '종신' 대통령을 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의지만 있었다면 종신 대통령을 하거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미국인의 황제'가 될 여지도 갖추었으나,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를 존중하였고[* 독립전쟁 시기 의회에서 재정부족으로 군대에 제때 봉급을 줄 수 없게 되자 화가 난 군인들이 '대륙회의를 뒤집어 엎고 장군님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워싱턴에게 보냈는데, 워싱턴은 군인들을 진정시키며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고, 이럴 때일수록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따르며 차차 보상해주겠다고 애쓴 적 있다.] 2선으로 8년만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임으로 생긴 관습 덕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고, 나아가 대통령제 시스템의 선례도 마련되었다.[* 후임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 [[그로버 클리블랜드]],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몇몇 후보가 3선에 도전하긴 했으나 4선까지 성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을 제외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심지어 이 경우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마저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도중 사망했다. 이후 1951년 수정헌법 22조로 대통령의 2선 제한이 확정되었다.] 워싱턴은 7년 동안 총사령관[* 만약 미국 독립 운동이 실패한다면 반역죄로 사형당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자리이다.]으로 대륙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7년 동안 자신의 저택은 요크타운 포위를 앞두고 프랑스 장군들을 접대하는 겸 해서 겨우 딱 한 번 들렀을 정도로 항상 대륙군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종종[* 특히 전열이 붕괴되려는 상황일 경우.]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까지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바람에 부관들이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끌고 나왔던 적이나 도망치려는 대륙군 병사들의 길을 가로막다가 공격당한 뻔한 적도 있었다. 여기에 전황이 나빠지자 원래 매년 받기로 했던 상당한 금액의 총사령관 급료를 미국 독립 후 총사령관 활동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실비 정산만 해서 받는 것으로 바꾼 것도 조지 워싱턴 본인이었다. 그 정도로 미국 독립운동에 독보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행사하며 투표하고 싶은 2명에게 각각 1표씩 투표하는 방식으로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방식이었는데 워싱턴은 모든 선거인단에게서 1표씩 받았다. 득표율은 50%이지만 모든 선거인단이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으므로 사실상 만장일치이다.][* 워싱턴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트렌턴 전투]] 이후 복무 계약이 만료된 민병대를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트렌턴 전투의 승전으로 사기가 올라간 와중에도 많은 민병대원들이 계약이 끝나고 떠나려 했지만, 워싱턴이 10달러 보너스를 약속하며 한 달만 더 머물러달라고 부탁했기에 남은 것이다. 연속된 패전 끝에 트렌턴 전투라는 작은 승전을 겪고도 떠나려 했던 자들이 당시 기준으로 적지 않은 돈이라고는 해도 고작 10달러를 위해 목숨 건 군 생활을 연장했다고 보긴 어렵고, 워싱턴의 됨됨이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지 워싱턴)]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 기존의 '''공식적''' 영역은 [[애팔래치아 산맥]]까지였다. 물론 그 서쪽에도 이미 미국인들이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 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친영파([[왕당파]]) 미국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거나 매국노로 몰려서 린치를 당했다. 그 중 상당수는 영국의 해외령이었던 [[캐나다]]와 [[뉴펀들랜드]]로 도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